열린우리당 제1기 원내대표를 마치며

  • 게시자 : 더불어민주당
  • 조회수 : 467
  • 게시일 : 2003-11-11 00:00:00
당원동지 여러분!
며칠 전, 파주에 있는 주내자육원을 다녀왔습니다. 중증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새 희망을 만들어 가는 곳이었습니다. 지난 총선 때 한차례 방문했습니다. 그때 꼭 다시 오겠노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마침 어린이날이고 해서 겸사겸사 다녀왔습니다.
처음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고 ‘우리집’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손님을 반갑게 맞는 모습이 참 고마왔습니다. 우리집에 왔으니 밥도 먹고 가라고 했고, 자신들의 일터도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가두고, 묶고 심지어는 때리기도 한다는데, 이렇게 열린 공간을 유지해 나가는 그분들이 정말 친구처럼 마음에 다가 왔습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커다란 가정을 이루고 사는 그들의 모습에 잔잔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오는 11일이면 새 원내대표가 선출됩니다. 어느 분이 원내대표를 맡으시든 잘 해내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제1기 원내대표의 임기를 사실상 마쳤습니다. 지난 해 원내대표로 선출된 후 "내년 총선에서 신당이 제1당이 되는 디딤돌을 놓겠다"고 소감을 밝혔던 기억이 납니다. 국민들의 기대와 지지, 당원 동지들의 헌신 덕분에 포부를 실현하고 임기를 마치게 됐으니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당원동지 여러분, 저는 원내대표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정당의 모델을 창출하기 위한 5대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정당민주주의 구현, 경제회복과 한반도 평화 실현, 신당의 평화개혁세력 구심점화, 정치개혁을 위한 입법 활동 집중 추진, 정책정당 육성이 그것입니다. 열심히 했지만 부족하고 미흡한 점이 많았습니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 원내정당의 초석을 놓았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고 미흡한 점이 참으로 많습니다.

원내정책정당의 기초를 만들기 위해 무엇보다 의원총회를 정책토론의 장, 당론결정의 장으로 만드는 일에 각별히 공을 들였습니다. 그것이 정치개혁의 출발점이요, 일하는 국회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의원총회는 6개월 동안 쉰여덟 번 열렸습니다. 대략 3일에 한번 꼴로 의원총회를 했습니다. 격론이 벌어진 날이 많았고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바로 그런 치열한 토론과정을 통해 47명의 소수여당이 단단히 어깨를 걸었기 때문에 정국의 급물살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버틸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작년 연말의 정치개혁 투쟁과 탄핵안 처리 과정에서 우리당 의원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일사분란하게 집행하는 문화가 어느새 우리당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것을 느낍니다.
우리당은 줄서기정치, 계보정치, 돈정치를 역사의 뒷전으로 몰아냈습니다. 민주적 대표성을 가진 의원들의 자율성을 무기삼아 정책과 대안으로 경쟁하는 원내정책정당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곧 걷고 뛰기 시작할 것입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국회 본관 124호실에 원내대표실이 있습니다. 30평 남짓한 공간입니다. 가끔 언론에 소개된 사진이나 화면을 통해 대표실 전경을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곳은 원내대표의 집무공간인 동시에 우리당 의원들의 토론장이고 휴식처이기도 했습니다. 탄핵발의에 맞서 철야농성을 하는 동안 지친 의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기도 했고, 자정까지 계속되는 본회의 때 도시락을 나눠먹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작년 연말에 있었던 정치개혁 등 수시로 크고 작은 회의가 열릴 때는 회의실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책상과 의자, 몇 개의 화분과 액자로 꾸며진 대표실은 여느 사무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 무표정한 공간에 가치를 불어넣고 표정을 만드는 것은 국회와 정치의 현실이었습니다. 지난 8개월간 우리에게 다가왔던 무게와 색채는 참으로 변화무쌍했습니다. 때로는 박수와 환호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또 때로는 침묵과 정적이 휘감았으며 분노와 탄식으로 절규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라크파병 동의안을 처리할 때였습니다. 오랫동안 토론하고 고민했지만 결국은 정부의 파병동의안에 찬성하기로 당론을 모았습니다. 마지막 투표의 순간에 저는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본회의장을 나서서 대표실로 들어오는데 문 앞에서 여러 후배들이 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미안해“라고 하는 것 밖에는 달리 무어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착잡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을 앓았습니다.
개인의 소신과 원내대표로서 책임감 속에서 저의 선택에 대한 평가는 후일로 미루겠습니다. 다만 민주적 토론을 통한 당론결정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당 원내대표로서 당론에 복속하는 것 이외의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날 대표실은 참으로 무겁고 넓더군요.

국민들, 그리고 당원동지들께서 커다란 기대를 갖고 계신 것처럼 저도 17대 국회에 기대가 큽니다. 소풍 전날 밤의 기다림인 것도 같고 학교를 졸업하고 막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을 때의 설레임인 것도 같습니다. 이제야 말로 정말 잘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내정책정당의 안착이 첫 번째 열쇠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내정책정당은 국회의원 개개인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정당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국회의원들끼리 정치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의원총회가 명실상부한 정책과 당론결정의 최고의결기관이 되는 것은 정당과 한국정치의 발전을 위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제 의원총회에서 상향식 토론을 통해 당론과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의원들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정치가 살아나고 국회가 살아납니다.

원내정책정당 실현을 위한 여러 가지 과제가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의원총회에서 어떻게 민의를 수렴하고 반영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1기 원내대표단이 의원총회 시스템을 구축하고 원내정책정당의 비전을 제시하는데 진력했다면 2기 대표단 앞에는 원내정책정당의 안착과 더불어 의총시스템을 보다 정교하게 가다듬어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원내정책정당에 당원 여러분의 자리가 없다는 걱정을 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한 모퉁이를 돌면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152명의 국회의원과 당원동지 여러분은 정치개혁과 정당민주화의 대장정을 함께 가고 있는 한 가족입니다.

원내정책정당과 기간당원 중심의 참여민주주의 실현은 언뜻 보면 서로 다른 길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물위에 떠있는 존재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국민의 여망이라는 반석위에 서있을 때만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당원동지 여러분은 원내정당이 반석 위에 설 수 있도록 감시하고 국민과 원내정당을 연결하는 파이프라인이 돼 주셔야 합니다. 아울러 당원의 실질적 참여를 보장하고 당원의 의견을 당론결정과정에 반영할 수 있는 정교한 시스템을 설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당원 동지 여러분! 우선, 원내대표 경선을 여러분의 축제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기간당원 중심의 참여정당을 건설하는데도 함께 참여해 지혜를 모아 주십시오.
우리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길 앞에 서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기대가 크지만 두려움 또한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개성이 강한 152명의 의원들을 아울러야 하는 원내대표의 역할에 대해 많은 분들이 걱정하고 계실 줄 압니다. 그러나 잘해나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테크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원칙과 진실에 대한 흔들림 없는 태도를 가질 때만 전술과 테크닉이 의미 있게 빛날 수 있습니다.

사상 최초로 민주개혁세력이 과반의석을 확보한 17대 국회는 엄중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개혁을 위한 설계도를 그리고 잘 계획된 설계도에 따라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이라크 파병문제나 국가보안법 개폐문제, 언론개혁 같은 현안도 치밀한 준비를 거쳐 차질 없이 해결해야 합니다. 정쟁과 일방적 주장만 판치는 우리 정치를 한단계 진일보 시킬 책임도 우리당에게 있습니다.

특히 이라크 파병문제에 관해서는 진전된 검토를 할 필요가 있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평화재건부대’라는 파병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인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특히, 최근 알려진 이라크 포로에 대한 인권침해 문제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사안입니다. 미국이 주장하는 전쟁의 정당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야만적인 행위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공격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책임 있게 대응할 임무가 우리당에 있습니다.

또 하나, 민생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최근들어 우리 경제의 앞날에 악재가 겹치고 있습니다. 중국 쇼크, 오일 쇼크 같은 돌발변수 때문에 경제와 민생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치권이 이런 걱정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원내 과반을 차지한 집권 여당인 우리가 할일이 많습니다.

당원동지 여러분! 여러분께서 17대 원내대표단의 눈과 귀가 되어 주십시오. 손발이 되어 주십시오. 부족한 점이 있으면 꾸짖어 주시고 모자란 점이 있으면 채워주십시오. 국회의원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저 역시 의원총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다하는 의원이 될 것을 당원 동지 여러분께 약속드립니다. 부족한 제가 1기 원내대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당원 동지 여러분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04년 5월 9일
열린우리당 제1기 원내대표 김 근 태